*이 글의 1부 “3월의 베를린”은 한국어로, 2부 “Berlin in August”는 영어로 되어 있습니다. 번역은 하지 않았습니다. 
*The first part of this text, 3월의 베를린, is written in Korean. The second, Berlin in August, is written in English. No translations are offered. 

1. 3월의 베를린

이 모든 혼란 이전에는 무엇이 존재했을까. 신용산초등학교가 존재했다. 내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가 가장 명확했던 시점은 처음 영국으로 떠나기 바로 전, 즉 1학년 때다. 신용산초등학교 1학년 4반 윤지수. 그 시절에 대해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겨울에 학교 앞뜰 가득 피던 목련이다. 사실 그건 가공된 기억일지도 모른다. 교화가 목련이었기 때문에 무의식적인 연결점이 생겼을 수도 있다. 상상이건 아니건, 내 머릿속엔 학교 앞 목련 나무들이 어렴풋이 또 분명하게 그려진다. 어린아이들이 흔히 자신이 속한 집단에 집착하듯 나는 목련에 은근한 의미를 부여했고, 봄방학이 다가오며 하얗고 말랑말랑하게 생긴 꽃잎들이 운동장에 떨어져 까맣게 변할 때면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꼈다.

목련이 내 첫 학교의 교화였다는 사실을 나는 근 10년 동안 잊고 살았다. 10년 동안 나는 3대륙에 걸쳐 학교를 자주 옮겨다녔고, 한 달 전 이 숫자는 4대륙이 되었다.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베를린에 도착한 나는 지하철역에서 홈스테이 집으로 걸어가며 거리 가득 핀 목련을 발견했다. 발걸음을 멈추고, 뭔가 찡하는 마음에 기억을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내가 목련에 반응하는 이유는 무엇이지, 아, 신용산 교화였구나.

독일에서 발견한 “한국 꽃”(품종의 원산지가 한국인지는 상관없고 내가 한국에서 보며 자랐다면 그게 바로 한국 꽃이다)은 목련뿐만이 아니다. 수업 들으러 가는 길에 나는 매일 개나리를 지나쳤고, 도시 곳곳에 핀 벚꽃은 독일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처음 독일에서 개나리와 벚꽃을 마주쳤을 때 갑자기 머리가 멍해졌다. 놀이터에서 함께 뛰놀던 소꿉친구를 어른이 되어 술집에서 마주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캘리포니아에 있는 학교 캠퍼스에서는 야자수와 아보카도 나무가 자라기 때문에 풍경부터 의심할 나위 없는 타지라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베를린은 가끔은 낯설게, 가끔은 낯익게 다가오며 나를 헷갈리게 한다.

내겐 어디가 집에 가까울까. 영어가 통하고 현지인으로 오해받기도 하는 캘리포니아, 혹은 지하철이 5분 간격으로 도착하고 담배, 오물, 비가 뒤섞인 도시 냄새가 나는 베를린. 전자는 수 년간의 공부와 관계맺음을 통해 적응해낸 환경이고, 후자는 서울과 비슷한 점이 있는 환경일 뿐이다.

‘집’이 될 수 있는 환경은 어떤 곳일까. 내가 정의하는 ‘집’은 계속 변하고 있다. 지금의 나에게, 나라나 도시를 집으로 삼는다는 것은 그곳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동이 자유로워 차 없이도 원하는 곳을 갈 수 있고, 시간과 인간관계가 자유로워 매력적인 소모임을 찾거나 북클럽에 가입하거나 바에서 누군가를 만나며 마음이 맞는 사람들을 알아갈 수 있는 곳. 법의 울타리 안에서 최소한의 안전과 자유가 보장됨을 느끼고, 밤에 걱정 없이 거리를 걸을 수 있고, 하고 싶은 요리에 필요한 재료들을 구할 수 있는 곳. 이루거나 시도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 나라의 구조적 시스템들을 잘 이해하고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기는 곳. 무언가가 잘못된다면 콜센터에 전화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돈을 모으고 관리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고,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곳. 지금 내게 이런 요소들이 그나마 형성되어 있는 곳은 서울이다.

하지만 다른 종류의 자유도 중요하다. 가치관이나 스타일을 감추지 않고 나답게 살 수 있는 자유. 일 년 내내 외국에 있다가 한국에 입국하자마자 마음이 탁 놓이는 동시에 숨통이 살짝 조여지는 이유는 아마 이런 자유가 보장됨을 나는 아직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장 오래 사랑했고 가장 깊이 이해하는 곳이기 때문에 어이없는 일을 가장 많이 목격하고 당한 곳이기도 할 수밖에. 나는 나의 존재가 있는 그대로 보장될 수 있는, 그런 꿈의 환경을 찾고 있다.

김치와 라면사리를 사러 베를린의 한인 슈퍼마켓에 갔는데 판문점선언 4주년 맞이 행사 광고문이 붙어있었다. 아득바득 여기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집’의 요소를 발굴해내고, 찾아봐도 없었을 때는 자기 손으로 건설해낸 이주민들이 얼마나 많을지. 나처럼 편히 교환프로그램을 하러, 혹은 인턴십을 하러 몇 달 왔다 가는 사람은 현지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어느 정도의 감정적 거리를 둘 수 있다. 길에서 인종차별적 발언을 들어도, 정치 스캔들이 터져도 ‘여기는 어차피 나의 집이 아니다’라는 생각에 마음을 비교적 편하게 먹을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그런 선택권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버티며 살아갈까. 브란덴부르크 문 앞 3.18 광장에서 통일 관련 행사를 계획하고 한인 마켓에 부탁하여 소식을 알린다. 3.18 광장은 베를린 장벽이 반으로 갈라놓았던 공간이자, 레이건이 “이 장벽을 허무시오”라고 선언한 장소이기도 하다. 이것 역시 베를린이 나를 헷갈리게 하는 순간이다. 역사를 마주하려는 끊임없는 투쟁과 현실을 직시하려는 개인의 노력. 독일에 와놓고서 나는 온통 한국 생각뿐이고 집 생각뿐이다.

난 집으로부터 너무 많은 걸 바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 적은 걸 바라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사실 도시는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길을 잘 몰라도 어찌어찌 지하철을 갈아타다 보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곳. 도시는 사실 그것뿐이라고 되풀이하며 온갖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새 친구를 찾아보았다. 20대 초반이라는 나이대는 어떤 무게를 가지는지. 영화같은 청춘을 쫓으려는 대책없는 낭만의 무게이자, 때를 알고 그 낭만에서 스스로 등을 돌려야 하는 무게이다. 답을 찾는 행위는 영 매력적이지 않은데. 나는 계속 텃밭을 가꾸듯 질문을 심고 질문을 가꾸고 질문을 키워내고 싶은데. 모든 가능성들이 베틀 위에서 나란히 평행선을 이루는 모습만 보고 싶은데.

이 글을 쓰다 나는 지하철 환승역을 놓쳤다. 난 아마 평생 집과 방랑과 대중교통에 관한 글을 쓰겠지. 어디에도 집을 두지 않으면 어디든 집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십대 시절의 막연한 철학은 결국 틀렸다. 새벽 2시에 지하철역에서 집으로 걸어가는 길, 독일의 꽃샘추위를 맞이한 나는 캘리포니아에서는 결코 필요하지 않았던 육체적 강인함을 찾게 된다. 캘리포니아의 따스함은 나를 늘어지게 만드는 반면, 베를린의 겨울바람은 자비없이 겉옷을 뚫고 날 채찍질한다. 더 빨리 걸으라고. 더 철저히 자신을 방어하라고. 하지만 똑같이 자비없는 서울에서 길러진 나는 계속 이곳의 찬바람에 대들며 눌러앉고 싶어진다. 개나리와 벚꽃과 목련을 보며. 대도시의 장파에 몸을 내던져 이야기를 찾고 공동체를 찾으며. 

환승역을 놓쳤을 때, 황급히 다음 역에서 내리고 몇 분을 허비했는지 계산해 보았다. 그리고 터덜터덜 플랫폼 반대편으로 걸어가며 나는 상상해보았다. 드디어 나의 집을 찾았을 때 – 난 언젠간 집을 찾으리라 믿는다 – 그건 어떤 형태를 갖추고 있을지. 도시일지 친구일지 애인일지 작품일지. 결국 서울이자 가족일지.

2. Berlin in August

I left Berlin twice. The first was when I left Berlin, in the sense that I left Berlin. The second was when I left Barcelona, in the sense that I was on my way home, that it was now time to gripe for some kind of poetry that would hopefully package my summer in Europe, make it all legible. But my mind could only process in fragments. “Eistee, bitte. Pfirsich.” Berlin Südkreuz, minutes before my first departure, how the German had rolled off my tongue so easily and without thought, like I had never struggled over how unintuitive the “ee” sound was. “Ground speed: 0km/h.” Barcelona airport runway, minutes before my second departure, how I wondered what it was that distinguished ground speed from plain speed. “Ich bin dein Mencsch,” the German movie I had wanted to watch all year appearing like magic on the in-flight entertainment system, Mencsch because the clunky Asiana interface had fumbled the spelling. 

To be on a Korean flight! My eyes snagged on every piece of familiar aesthetic that surrounded me: the manspread of the Korean dad seated to my left, the perfect femininity of the woman demonstrating the oxygen mask, the subtitles to “Ich bin dein Mencsch” being offered only in Korean, me enjoying this offer, realizing for the first time that English didn’t need to exist as an intermediary between how I perceived these languages, that I was on a direct flight home, that my time in Berlin had very little to do with Stanford and much more to do with nationality and belonging. 

What a strange homecoming it was. A journey to a house and bedroom I had never actually seen before, where my family had put down firm, hopeful roots in my absence. The longing I had for Seoul was stronger and more urgent than I had ever felt it. And still I knew that I should prepare myself for the seemingly contradictory experience I would have once I was actually home; the desire to leave, to count down till my next departure, till the next measurable, dramatic threshold I could cross. 

There was an interpretation I had of life, something I had synthesized out of nowhere on a hot evening in Genoa as I sat numbly staring at the pattern on the dinner table, trying to claw back to reality. That for each spectrum of existence—home / away, sobriety / intoxication, comfort / adventure, sloth / industry, sweet / savory—my perpetual desire for the other end, whichever I was not occupying at the moment, was not the result of the human species being tragically fated to thirst for the other side of the fence. It was just the natural manifestation of how my compass always pointed towards a perfect equilibrium, and the closest thing I could come to it was to bounce distractedly between the two ends, moving as frequently as possible. And this was my happiness, the way the vibrating rhythm of a moving car always rocked me to a perfect sleep.

So what was I leaving by leaving Berlin. I had no idea. It could be months or decades before I returned. All I could think about was the hastiness of departure, of travel logistics distracting me from the moment. All I could think about was how without the urge to live, there was no urge to write (and how I hoped the reverse to be true, how that would form the very symmetry I desired). How Berlin showed me that I still found new things exciting and people gorgeous, still could pluck poetry from the creases formed between the fat folds of daily life. Not all was lost, and it was possible that something had been gain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