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왜 한국어로는 글을 쓰지 않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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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서 점점 윤곽이 잡혀가는 등장인물들은 매번 나와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
주인공은 필히 여자아이로. 17세 정도.
물론 30대 남성의 영혼에는 전혀 다른 시적인 무게가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하루를 지내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소설 속 인물들은 나와 가까울수록 진실하고 쓰기에도 수월하다.
하지만 한 번도 동양인 소녀를 구상한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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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잃은 후에야 그것을 제대로 사랑하게 된다고 한다. 사랑보다는 헛되고 아련한 소유욕에 가깝지만.
그렇게 나는 국어가 영문보다 예쁘다는 것을 그 많던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낙엽처럼 하나 둘 떨어져 마르고 잊혀질 때까지 알지 못했다.
국어 교과서를 마지막으로 편 것은 중1때. 그때까지만 해도 이 언어는 잃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그저 나의 일부분이었다고, 소홀해진 것을 조금은 이해해 보라고 과거의 내 자신이 억울하다는 듯이 귓속에서 푸념하고 있다. (조용히 좀 해, 네가 뭘 잘했다고 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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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갑자기 한국 소설이 읽고 싶어졌다.
서점에 가서 “신작 소설”이라는 문구를 찾아 그 주위를 맴돌았다.
사실 한국 책을 고르는 내 눈은 전혀 까다롭지 않아, 공상과학이 아니고 표지가 마음에 드는 책이라면 일단 집어들었다. 한국 작가라면 그걸로 된 것이다. 딱히 무언가를 찾고 있던 게 아니라 그저 이 빛 바랜 말투가 그리워서 집어든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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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는 것, 이해하지 못하는 것 다 끌어모아 소재로 고려해 봤지만 가장 쉬운 문화적 정체성에 대해는 절대 쓰고 싶지 않다. 너무 흔해서뿐만이 아니라 무언가 “한국 작가” 라고 독자들에게 색안경을 씌우는 느낌이 들어서다. 굳이 내가 찾아다니지 않아도 편견은 제 발로 와서 엉겨붙을 테니, 내 손으로 내 문학을 흐트러뜨릴 생각은 없다. 결국 내 시는 인간이나 사랑이나 신앙이나 허영에 관한 것이지 (말은 참 거창하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 관한 게 아니니까. 겁쟁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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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her tongue”. 이 단어들은 내 혀에서 쓴맛을 내며 조롱하듯이 떨어진다.
보여야 할 것이 보이지 않는다. 있어야 할 것이 없다.
지금도 단어들은 하나 둘 소금기 있는 흔적만을 남기고 증발해간다.
습득했던 때만큼 갑작스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마치 그저 세상의 물리적 이치를 따라 움직인다는 듯이- 숨죽은 발소리로 그렇게 떠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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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모든 게 아까 그 질문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글쎄.
국문으로 쓰지 않는 이유는, 내 “모국어”와 내 “목소리” 사이에는 이제 부인할 수 없는 거리가 있어서다. 인정하기 싫은 만큼, 한글을 써내려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조용하고 존재감 없는 그 열세살 아이, 내 국어가 얼어붙어 있는 그 중학생이 되어버린 것 같이 끝없이 불안하고 연약한 기분이 들어 마치 내 속살을 드러내는 것처럼 떨고 있으니까. 문장을 어떻게 꾸미고 내 본내를 어떻게 숨기고 사람들을 어떻게 속이는지는 전부 영어로 배웠으니까.
이미 충분히 틀렸으니까.
서툰 게 두려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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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오늘 서점에서 집으로 오면서 얼핏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이 어느새 참 고등학생 같아 보여 놀랐다. 사춘기의 거울로 수십 번을 곱씹은 내 얼굴인데도. 어쩌면 나는 영어를 뺏기는 순간 그저 아이로 돌아가는 것일 수도 있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그 나이로. 말을 꾸밀 수 없으니 아무것도 숨길 수 없는 이 솔직한 문장으로. 이 지독한 완벽주의에서의 탈출일 수도 있겠다.
오늘 저녁은, 백반에 묵무침에 불고기였으니까.
사실 그게 그렇게 맛있었으니까.